뱃놀이, 강상훈 개인전
2012.10. 31 ~ 11.
13
am 11:00 – pm
6:00
통의동보안여관Artspace
Boan
Opening 2012. 10.
31 _pm 5
기획: 통의동
보안여관
총괄기획: 최성우/기획:창파
지나간 미래를 떠도는 생채기들의 난파선
최금수·이미지올로기연구소
소장
1. 너무 현명한 오늘
“너희들은 아주 현명했다 / 하지만 너무 현명하지 않았나? / 너희들 거기 손에 달고 있는
게 근육 아니냐? / 그런 놈들 앞에선 일이 빗나가려야 빗나갈 수 없다. / 그렇게 똑똑한 인간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 너희들한테는 / 순간적인 애정이나 / 바보같이 왈칵하는 게 없다고나 할까 / 어쩌면 너희들은 그런 / 자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어 갔다가 / 어쩌면 다시 빠져 나왔을지도 모르지 / 어쩌면 너무 많은 애정으로
감동 받은 / 너희들의 팟저로 인해 / 하지만 그걸 어쩌면
만회할 수도 있겠지 / 아직 잔정이 / 남아 있다면. 너희들 코끝엔, 단지 자연스러운 것을 / 들이대야 하니까. / 짧고 굵게 말하지: 너희에게 권한다 / 동참하라 내 투쟁에. / 좀 비이성적여 보란 말야!”
몇해전 라삐율에 의해 남한에서 상연되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미완성작 『팟저-단편』에서 팟저가 뭇 등장인물들에게 외친 말이다. 물론
브레히트는 다중성격의 요한 팟저를 동물적 시대감각을 지닌 이기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로 묘사했다. 알다시피
그의 상황극은 대부분 전쟁과 학살의 시대에 국가와 계급 그리고 청산과 혁명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다루고 있다.
물론 무자비한 살육들로 얼룩진 시대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꾼다는 것은 어찌보면 사치스런 일이다.
미래에 대한 구름 잡는 설계보다는 치 떨리는 현실로부터 벗어나고픈 맘이 우선할 것이기 때문이다.
낡은 것과 새 것의 갈등은 시간의 파장에 포획된 삶에서는
늘 존재한다. 동전의 양면인 파괴와 건설. 결국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버릴까가 문제인데 홀로 살 수 없고 서로 이웃하며 살아가야 하는 더운피를 지닌 인간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어떤 집단 또는 개인이 편협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힘에 의해 일방적인 갈등이 조장될 때는 그 해결법을
찾기란 여간 버겁지 않다. 먹고사는 것뿐만 아니라 애틋한 감정들마저 빼앗아가는 피 말리는 일상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치고 주린 나약한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용기란 피폐한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두려움인 탓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 없는 극한에 달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는 방어하기엔
너무 약하다. 공격으로 전환하자’ 『팟저-단편』에 등장하는 성급한 코이너가 외친 말이다. 지난 세기 우리는
이 지겹게 암울한 공포와 막막한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다.
2. 지나간 미래
보안여관에 전시된 강상훈의 근작 『낙화유수 落花流水』를
보면서 유행이 지난 브레히트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개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인물상들은 굳이 조각의 한 형식인 군상의 특징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첫 눈에 알 수 있다. 더불어 강상훈이 2009년 대안공간 풀 『ANIMALS 獸』에서 보여줬던 현실을 패러디한 세련된 유머러스함의 단편들과는 달리 얽히고설킨 대하소설 같은 비장함이
이번 전시에 함께하는 탓이다.
본디 예술이란 기억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산물이기에 관념과
현실의 대립항을 오가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그럴듯한 형상을 제시하곤 했다. 때로는 그 형상이
지닌 감염력으로 일상 또는 경험의 반성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더구나 인물조각은 오랫동안 그 직접적인
효용성과 실감나는 경험의 전유를 바탕으로 ‘지나간 미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렇기에 강상훈의 게걸스런 동물상 또는 으스스한 인물상에 일괄되게
드리워진 그림자 또한 ‘지나간 미래’에 대한 애증일 수 있다.
특히 그는 재료에 대한 선택조차도 내구성보다는 경험적
느낌을 우선으로 한다. 기왕에 써왔던 아프도록 무거운 납과 틱틱한 시멘트, 유연함을 기반으로 굳어진 피부와도 같은 석고와 나무를 비롯하여, 반짝이는
알루미늄과 빳빳하게 옻칠된 서글픈 삼베천 등은 각자의 질료적 심상을 바탕으로 문학적 수사에 가까운 발언을 기꺼이 돕고 있다. 즉 선택된 질료 자체가 이미 이입된 ‘지나간 미래’의 이야기인 셈이다.
재료 다음으로 ‘지나간
미래’에 대한 애증이 읽혀지는 것은 표정이다. 다소 어눌하고
둔탁하게 구성된 덩어리 구조인 덩치들에 비하면 이들의 표정은 상당히 날카롭고 날렵하다. 더불어 그 두터운
덩치의 표면을 빙빙 겉도는 표정들에서 “거짓말, 허풍, 위선, 오만…” 등 삶의
디테일이 느껴진다. 강상훈은 이 얄굿은 표정들로부터 “잡다한
사변이 가진 무기력의 함정으로부터 단숨에 빠져 나오게 하는 힘”을 조장하려 했다. 그는 여기서 유머와 패러디를 적극 활용한다. 블랙코미디라고 하기에는
그 절실함과 엉뚱함이 다소 지나친 지점에서 ‘지나간 미래’를
바라보려 했던 것이다.
3. 상처와 눈빛
예사롭지 않은 재료에 편치 않은 표정들이 덧씌워지면서
『낙화유수 落花流水』의 각 인물들은 아팠던 상처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의 현재는 과거의
시간에 단단하게 묶여있다. 물론 삶에 있어 과거 없는 미래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시쳇말로 ‘인생은 어둡게 살기에는 너무 눈부셔’ 허황되더라도 찬란한 현재와
미래를 꿈꿔보는 가슴 벅찬 감동도 한번쯤 느껴 봤음직도 한데 강상훈의 군상들에 입혀진 상처는 굳게 닫힌 철옹성처럼 어떠한 일탈도 허락하지 않는다. 굳이 누군가에 의해 안락한 치유를 바라며 엄살 부리는 상처라기보다는 묵묵히 역사를 짊어진 다소 거룩한 아픔을
간직한 채 푸석하게 말라버린 미이라와 같다고나 할까. 저항 또는 극복,
이도저도 아니면 치유 또는 피안이라는 선택은 이들에게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과거에 대한
그리고 어쩌면 현재에도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반성 내지는 고발이라면 좀 더 다른 형상을 뒤집어썼을 터인데 이들은 과거의 이전은 물론, 현재의 시간까지 각자가 지닌 상처와 눈빛으로 재빠르게 흡입하여 미래를 더욱 불안하고 암울하게 만든다. 마치 뒤돌아보는 것에 전혀 두려움이 없기에 스스로 굳어져버린 망부석들처럼. 그래서
이 꼴들을 보고 있자면 과거의 아픔보다 미래에 노정된 슬픔에 더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두터운 상처들은 전혀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황당하지만 그저 어떤 무자비한 권력의 하잘 것 없는 화풀이 대상이었다는 것. 심지어 가해자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노신의
『아Q정전』에서처럼 우연히 세상에 태어나 시대의 역경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니 더럽고 재수 없게 똥바가지를
뒤집어써서 풍기는 악취와 같다고나 할까. 좀 더 우아하게 말하자면 민초라고 불리며 여린 바람에도 이리
눕고 저리 눕는 한없이 여린 풀에 각인된 회복 불가능한 누런 골절 또는 무름이란 표현이 더 적합한 생채기들이다.
어차피 이 생채기는 그냥 그렇게 안고 살다보면 새잎이 나오면서 점점 말라 사라질 탓. 행여나
누군가 보살피는 이가 있어 도려낼 수만 있다면 좀 더 빠르게 아물 수도 있겠지만 안방을 차지하며 고상한 향기를 뽐내는 도도한 난초도 아닌 척박한
들판에 보잘 것 없는 잡풀을 누가 관심을 가져주겠는가. 더 번지지만 않기를 바랄 뿐. 그렇게 또 잔인했던 한 계절은 시들고. 지루하게 똑같지만 겉으로는
새로운 삶으로 가득할 것 같은 또 다른 지루한 계절이 오면 그만이다.
어찌되었든 시퍼렇게 끔찍한 멍들은 치유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그나마 살아있는 쓸모 있는 감각들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있다. 아니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상처가 깊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실은 누군가에게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전혀 되풀이된 바 없고 경험된 바 없는 눈부신 설레임의 기대일 수도 있다.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아름다운 선물 중의 하나인 망각을 무시하고 미리 새로운 날들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솔직히 이들에게 옳고 그름의 문제도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몸과
맘으로 경험된 생채기는 곪을 것이었다면 벌써 뭉그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을 것이었다면 이미 뽀얀 새살이
돋았을 터. 그저 이들에게는 시간을 응고시켜버린 아픔만이 전부다. 자칫
무책임한 망각과 섣부른 희망은 그나마 꼼지락거리며 살아남은 생채기들의 존재를 앗아갈 뿐이다.
4. 말라버린 시간
그 삭막하게 말라버린 시간의 강에 생채기들이 배를 띄었다. ‘말라버린 강에서 배를 만드는 것이 쓸모가 있는가? 내일이라는 것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놈의 무뚝뚝한 오늘도! 이렇게
앉아서 아직 아니다와 이미 더 이상 아니다 사이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 팟저의
독백이다.
강상훈의 생채기들은 어찌되었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배려된 배에 올랐다. 그것이 어떤 항해인지 모르겠지만 떠 있는 출렁임만은 분명 느낄 수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 순박한 생채기들이 탄 작은 배는 목적지가 불분명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난파선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엄숙한 고난 앞에서 감미로운 사이렌의 묘성도 효력을 잃었다. 생채기들은 서로에게 잃어버린 기관 또는 감각에 의해 조장된 굳건한 유대를 동력으로 하며 배를 저어간다. 하지만 실상은 다소 공허한 손놀림만 분주할 뿐. 여린 생채기들이
힘을 합해 만들어낸 동력보다도 그들이 지니고 있는 아픔의 무게가 더 크기에 그나마 부력에 의존하여 떠다니고 있다는 것마저도 고마울 따름이다. 상심한 눈빛의 생채기들은 그렇게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때로는
의미심장하게. 때로는 그나마 허락된 얄팍하고 얄미운 썩소와 함께.
5. 또 한바탕의 울렁증
이미지가 유익한 것은 유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조각이라는 장르의 고유성격 내지는 역사적 기능을 제외하더라도 강상훈의 생채기들은 사뭇 다른 공동체들의 위선과
갈등 그리고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인간사회의 미래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장 나약하고
비굴한 생채기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유대와 욕심 많은 가해자인 권력집단, 그리고 어찌되었건 정신줄 놓은
생채기들이 좀비처럼 배를 타게 만든 아직 뭔가 불확실하지만 분명 기능하고 있을 미완의 막연한 구상들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
뒤섞여 호출하거나 충돌하며 혼란스런 파장을 생멸시킨다. 마치 모든 벽이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마주하는
공허한 헛것들의 반복 탓에 진짜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헤매는 울렁증처럼. 절대 요란한 강요도 선동도 아닌
여린 생채기들의 나약한 눈빛과 힘겨운 몸짓으로 말이다.
‘탁자가 다 됐네, 목수여. / 우리가 그것을 빼앗는 것을 허락하게. / 이제 거기다 대고 이리저리
대패질하지 말게 / 칠하는 것을 멈추게 / 그것에 대해 좋게도
나쁘게도 말하지 말게: / 그 상태 그대로 우리는 가져가네. /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네. / 그것을 내놓게나.’ 『팟저-단편』 마지막 코러스의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