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적 타의적 도시탐방(비아트 vol.45)


photo by 홍석진



자의적 타의적 도시탐방


시작은
때론 아주 사사로운 일들이 중요한 사건에 결정적 요인이 되곤 한다.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하나, 몇 해 전 부산으로 출장을 왔다가 자갈치 아주머니들이 가지런히 손질해놓은 생선들을 보았다. 가판대에는 고등어와 조기만이 아닌 이름 모를 생선들이 줄 지워 있었다. 이 모든 생선들을 계절별로 맛보려면 2년 정도 부산에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더랬다. ,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가 너는 어디서 살고 싶어?’라고 물어오면 지체없이 바닷가라고 말했는데 그건 사진처럼 남아있는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에 관한 기억 때문이었다. 아마도 가족여행이었으리라.

누구나 거주이전의 자유를 갖는다. 어디든 원하는 장소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빈한한 생활 안에서 그 자유를 누리는 호사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집을 2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세입자에게 거주는 선택이라기보다는 타협이며, 꽤 제한적 조건에서 소모적 조율이 동반되는 일이다. 지난 10년간 인구의 이동은 점차 감소해 왔다고 한다. 지속적 경기 침체가 도미노처럼 주거 대란을 야기시켜 이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로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기억이 필자의 거주지를서울'에서부산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게다가 부산에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거주지역을 리서치하는 것이었으니, 시작은 사사로웠으나 우주적 기운이 자의적 타의적 도시탐방으로 이끌었음이 틀림없다. 이번 글쓰기는 미술 이론에 기대지 않고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거주와 이주에 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도시의 가속
현재는 과거로부터 흐른다. 잠시 과거 거주지를 복기하여보니 지난 10년간 우리 동네라 부른 곳이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망원동이고, 다른 하나는 서촌이다. 망원동은 지리적으로는 홍대 앞, 서교동, 상수동 등의 연장선에 있고, 한강과도 접해있지만 한 강 건너 아파트 단지들이나 홍대 앞, 상수동보다는 분위기가 다른 동네였다. 홍대 주변은 소위 젊음과 인디를 상징하는 문화 공간들이 골목마다 자신의 속도로 이 지역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부터 서서히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어 공간들이 하나둘 다른 장소로 이주하여 가며 정체성이 사라져갔다. 나는 그 바람이 합정 사거리를 너머 거세게 불어닥치던 그때 망원동에 살고 있었다. 시쳇말로 혼밥하는 싱글 인구가 많아 망원시장은 퇴근 시간이면 1인분의 요깃거리를 사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는데 그 중에는 예술가와 활동가 친구들이 대체로 많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각자의 것에 경계는 있으나 또 허물없이 공유가 가능한 느슨한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2010년 즈음 나와 친구들은 해마다 상승하는 집세를 견디지 못하고 각자 다른 도시로 이주하였다. 지금 망원동은 다시금 공유경제의 중심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나눔의 필요성과 가치를 발빠르게 인식한 청년들에 의하여 어쩌다 가게’, ‘협동식당 달고나와 같은 공유를 키워드로 한 공간들이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승만하는 임대료, 올라가는 물가, 무너진 주택시장, 낭만을 제거한 삶 등 환경은 황폐해졌지만 개인의 공존하는 서바이벌 게이지가 높아진 것이다. 또한 구체적이다.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새로운 수익구조를 창출하기 위한 모색이라던가 입주자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5년 장기임대 등 섬세한 부분까지 절실함이 배어있다.

두 번째 거주지인 서촌은 경복궁, 청와대, 광화문의 서쪽 지역을 말한다. 누상동, 옥인동, 체부동, 통의동, 통인동, 효자동 등 열세 개 작은 동들이 붙어 있다. 예부터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터로 삼았으며 예술의 뿌리가 깊이 자리한 곳이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길부터 북악산 창의문 권역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1] 이는 이동의 자유를 탄압하는 규제임이 분명하나 역설적으로 서울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개발의 속도를 늦추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서촌의 한옥, 근대건축물, 조선 시대 골목길의 원형을 남길 수 있게 한 양가적 장치로 작동하였다. 2005년부터 문화예술을 표방하는 공간들이 자리 잡으면서 오래된 서울의 경관과 동시대 예술이 어우러져 더욱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내는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최근에는 관광사업이 과도하게 거주 공간까지 침해하는 문제와 인사동과 북촌의 문화 공간들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처럼 제약과 열악함이 오히려 도시의 개성을 도드라지게 하고 정체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공유의 개념이 도출되었으며 시간의 깊이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는 가속을 멈춘 것이 아니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의 도시에서 변화해 온 현재는 다시 미래를 향해 흘러가고 있으므로 이제부터는 움직임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도시의 특수성과 자본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장소가 특수성을 갖는 순간 부동산은 들썩인다. 그리고 특수성을 빙자한 다양한 관광 상품이 거리를 매운다. 망원동이 그렇고 서촌이 그러하다. 길을 덮는 관광버스의 행렬은 거리에 사람을 바꾼다. 다음으로 점포들의 성격을 바꾼다. 곧 동네의 정체성이 바꿀 것이다.

부산(釜山)스러움을 지워가는 도시
이제 현재형 우리 동네이다. 부산시 동구의 초량동과 수정동은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두 도시는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있어 지형적 특성이나 도시 외관이 여러모로 겹쳐 보인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전후로 도시를 형성하였고 고관[2]의 후편이 일본인 거류지역이었기에 일본식 가옥 형태가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시대별 흐름과 건물주의 취향에 따라서 외관과 내부를 개조하여 혼합된 미묘한 거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연 산복도로(망양로)에서 내려다보는 부산항과 바다의 빼어난 경관이 부산의 대표적 풍광이라 할 만하겠다. 부산 동구에서 이바구길을 특화하여 이바구공작소, 이바구충전소, 이바구자전거 등 관광상품을 만들어 현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나 부산역 앞의 중앙로를 조금만 벗어나면 금세 골목이 얼굴을 바꾼다.

초량동은 여러 각도에서 총체적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부산역, 철도, 항만, 지하철 등 교통의 중심이며 전통시장, 복합 생활 주거지역, 근대건축물과 산복도로, 차이나타운, 텍사스촌이라 불리는 외국인 상가 거리, 일반 상업지역 등 다양한 장소를 포괄하는 원도심의 중요한 축이다. 이에 반해 수정동은 이름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 옛 지명인 두모포는 깊은 산 속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수정(水晶)은 맑은 샘이 솟아나는 곳을 가리킨다. 즉 수정동은 물이 참 맑고 많다는 뜻이다. 1914년 지적원도에서 살펴보면 실핏줄처럼 도시 내부로 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물길이 그대로 복개되어 현재의 도로가 되었다. 시각적으로는 도시에서 감춰져 있지만 거리를 걷다 보면 물길로 추정되는 길에서는 계곡이라 착각이 들 정도로 우렁차게 물이 흐른다. 초량동과 수정동에 근대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이곳으로 희망을 품은 자발적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평지가 미약한 탓에 고지대까지도 판잣집이 들어섰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란민들의 삶터로 주거공간은 더욱 빽빽해졌다. 이때 형성된 구릉의 집들은 지형에 의존하여 독특한 형태를 띠었으며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면 겹겹이 이어지는 집들의 행렬과 항만이 장관을 이룬다.

반전은 부산스러움을 지워버리는 과감함이다. 부산시의 2016년 주택재개발(도시환경정비) 사업 추진현황(‘16. 8. 31.)에 따르면 현재 부산시 내에서 총 137개 구역이 재개발을 추진 중이거나 인허가 과정에 있다.[3] 초량동과 수정동 두 개 동만 보더라도 총 7개의 구역이 재개발 권역이다. 참으로 동시다발적이고 규모도 대단하다. 보존보다는 정비에 방점을 둔 것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우고 자로 잰 듯이 반듯한 길들로 구획을 나누고 보기에 그럴듯한 아파트와 빌딩들을 세우며 이전의 도시들은 삭제한다. 이곳은 반전 속에서 매일같이 진통을 앓고 있다. 부산시는 도시기록화사업으로 2008년부터 3년간 부산시의 기록물을 끄러모아 자료화하였다. ‘옛 도시 부산과 부산사람들의 모습을 본다는 것도 과거를 추억하고 기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옛것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찾아서 그 귀한 의미를 알고,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함이다.’[4]라 말하고 있다. 기록과 삭제가 같은 기관에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모순되게 느껴진다. 혹자는 버리기 어려워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 중 사진을 찍어 기록해 두면 실제 물건을 버리는게 더 쉬워진다고 하였다. 부산시도 비슷한 컨설팅을 받은걸까.

우리 동네 탐방은 이제부터
어쨌든 자의적 타의적 도시 탐방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드는 상념이 있다. 마지막 리서치이자 투어에서 우연히 들어가게 된 집이 하나 있었다. 수정동 국일주택 맨 위층의 어르신 댁이었는데 투어 참여자 모두를 집으로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주셨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올라가 집 안에 들어서면 상상하지도 못한 바다 풍경이 전면에서 사람들을 맞는다. 국일주택은 1980년에 지어진 테라스 주택으로 아랫집의 옥상이 윗집에 테라스로 사용되는 계단식 구조이다. 아마도 오래된 외관에서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집의 내부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거주의 과정은 공간에 자기를 아로새기는 과정이다. 시간을 들여 매만져 온 집이 바로 어르신 삶의 일부인 것이다. 거주는 공간사람이 매개하는 과정에서 단순하게 공간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 장소에 개인의 시간과 기억이 쌓여 이라는 총체적 시공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무수한 점들이 모여 선으로, 선에서 다시 면과 공간이 되는 것처럼 도시는 다수가 만들어낸 시공간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시의 재개발은 총체적 사유를 갖고 도시와 골목과 사람의 속도를 가늠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곳만의 부산스러운 속도를 고수해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본다.


[1] 1982년 통행금지가 해제되며 이 지역의 통행금지도 완화되었으며 2009년 북악산 산책로가 개방되며 전면적으로 해지하였다. 그러나 통의동 검문소부터 삼청동 입구까지 연결되는 청와대 길은 신변검색을 받아야 한다. 보안경찰의 요구에 가방을 열어보이거나 신분증을 보여주는 사람에 한하여 지나갈 수 있다.
[2] 조선 태종 7, 일본인들에게 무역을 허용한 개항장에 관사를 설치하여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이 이뤄지는 곳을 왜관이라 하였다. 현 수정시장 일대의 두모포왜관이 현 용두산공원 쪽으로 옮기면서 초량왜관이라 하였다. 두모포왜관을 고관, 초량왜관을 신관이라 불렀다.
[3] http://dynamice.busan.go.kr/
[4] 부산의 기억, 도시기록화사업, 2008~2010, 부산광역시 자료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