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1925, 부산의 사라지는 것과 현재를 잇고 미래를 상상하다


100년 된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초입을 비추던 가로등, 철마다 다른 꽃을 선사하던 담장, 낯선 이를 향해 짖던 개, 개조심이라 써 붙여진 대문, 수요일마다 골목을 차지하던 분홍색 어르신 목욕차, 여관 입구부터 골목까지 쓸던 세심한 주인장의 비질, 낮게 들리던 장기 투숙객의 라디오 소리, 점심때면 코를 찌르던 추어탕집의 매콤한 주꾸미 양념 냄새. 초량동 고관로13번길 골목은 2016년 8월, 초량1-3구역 재개발 공사로 사라졌다. 부산의 초량동과 수정동에는 백 살 넘은 골목길과 물길이 혈관처럼 도시를 지난다. 골목은 곧게 뻗은 대로보다는 물살이 굽이치는 모양대로 생겼거나 평지가 미약한 지형 탓에 경사면에 세워진 주거지를 따라 좁게 꺾인다. 이곳에는 고지대로 오르는 계단 길이 참 많다. 100칸 정도야 쉽게 넘기는 계단 길을 오르면 그 끝은 어느 길이라도 산복도로다. 산복도로는 까꼬막에 집터를 잡은 이를 위해 산 중턱을 가로질러 버스가 다니도록 만든 도로이며 다르게는 ‘망양로(望洋路)’라 불린다.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처럼 그곳에 서면 꼭 맞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능선 따라 겹겹이 줄지은 집들과 컨테이너가 쌓인 부두, 통통배부터 묘박지의 대형 화물선까지 이를 품은 너른 바다가 있다. 밤이면 이곳은 마치 별빛이 내려앉은 듯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1964년 개통한 산복도로는 동구 범천로에서 서구까지 약 10km 길이로 연결되어 있다.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1972년부터 산복도로 주변에 짓는 건물의 고도를 제한하였다. 그렇게 부산만의 대표적인 전경을 보여주는 전망 포인트를 얻었다. 하지만 요사이 고도제한을 해제하라는 목소리가 드높다. 원도심 구의회 의장단은 고도 규제가 주민의 재산권을 침해해왔다고 40년 이상 참아 온 불만을 담아 고도제한 해지를 건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제한은 산복도로에만 해당하고 북항 재개발로 지어질 최대 106층의 빌딩에는 그 영향력이 다다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2023년이 되면 동구, 중구를 잇는 초고층 빌딩벽이 세워진다. 더 놀라운 것은 현재 부산에서만 135개 지역이 동시다발적으로 재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 숫자는 이 도시 앞에 놓여 진 미래이다. 그렇다면 변해가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 '수정동' (2016)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
초량1925는 100년 된 부산의 도시들을 기록한다. 개화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해방, 산업화시대라는 질곡의 근‧현대사를 거쳐 만들어진 부산 원도심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도시건축 전문가, 향토 사료 연구가, 문화예술기획자, 작가들이 뜻을 모아 ‘초량1925’를 시작하였다.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은 2015년부터 3년째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부산 동구 초량동을 첫 출발지로 하여 2016년 수정동과 현재는 영주동을 리서치 하고 있다. 초량동은 부산역, 철도, 항만, 지하철이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근대건축물, 전통시장이 있는 생활 주거지역이다. 또한, 차이나타운, 텍사스촌 외국인 거리 등의 상업지역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도시이다. 반면 수정동은 1607년 두모포 왜관이 설치되었다가 없어지고 고관(古官) 마을로 불리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란민과 도시 노동자의 주거지였다. 매립지, 배수지, 부산진역사, 일식 가옥과 같은 지역연구의 가치를 더하는 공간과 더불어 도시 노동자의 애환이 담긴 장소이다. 이 두 지역은 현재 일곱 곳에서 재개발이 진행 중이며 중앙로 건너편에 북항 재개발로 인한 변화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초량동 원도심 골목 (2016)
정만영, 소리장소 리서치 지도 (2016)
양자주, 훔쳐진 시간 installation view (2016)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은 초량동과 수정동을 다음과 같이 리서치하고 기록하였다. 리서치는 사전 문헌 조사와 스터디를 병행하였고, 6개월간 13회에 걸쳐 지역을 답사하였다. 구술채록은 동구노인복지관의 협업으로 지역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그분들의 사진을 기록화하였다. 이처럼 연구는 거시사(巨視史)의 관점과 생활 미시사(微示史)를 함께 바라보고자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산대학교 도시건축연구실 팀은 지역의 장소에 대한 건축 리서치와 함께 1914년 지적원도를 현재 수치지형도에 대조하여 도시 조직과 그 형태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초량동의 100년 옛길과 수정동의 100년 물길을 찾을 수 있었다. 수정동의 연구 결과물은 1) 물길 2) 옛길 3) 건축 4) 미시사 5) 사운드 6) 아트웍(Art work) 7) 재개발이라는 테마로 하여 이미지 지도로써 정리하였다.

작가들도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하며 자신의 관심사를 작품으로 구체화하였다. 정만영 작가는 2009년부터 부산 원도심과 산복도로의 소리 장소를 찾아다녔다. 전통시장에 시끌벅적한 소리, 컴퓨터 수리를 외치는 트럭, 바둑 두는 할아버지의 흥얼거림, 도로 밑 백 년 물길처럼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도시의 소리 지도’로 만들었다. 양자주 작가는 4개월간 초량동의 고관로 골목을 돌아다니며 재개발로 주민이 떠난 공가의 페인트, 철망, 폐목재 같은 부산물들을 표본으로 채집하고, 사라질 장소를 소규모로 답사한 후 참가자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부산유람단은 온라인으로 신청한 40여 명의 일반 시민과 함께 리서치 지역을 3시간 정도 걸어보는 투어이다. 수정동의 부산유람단 투어에서는 국일주택의 골목길에 나무 상자와 연결된 종이컵 전화기로 정구식 어르신의 아코디언 연주를 들어보는 <기억의 줄기> 퍼포먼스가 있었다. 이를 기획한 하쿠승호 작가는 골목을 돌며 떠올린 어린 시절의 향수를 참여자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였다.

2017년도 리서치에는 일본의 저명한 사운드 아티스트인 가와사키 요시히로를 포함하여 6명의 작가가 경성대 글로컬 문화학부 학생 2명과 함께 중구 영주동을 답사하고 있으며, 오는 9월 27일 초량동 일식 가옥에서 작가 세미나를 개최한다.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은 3년의 활동을 갈무리하는 아카이브 전시를 내년 하반기에 선보일 계획을 하고 있다.

청년-장인 메이커즈 매칭 프로젝트 ‘비 메이커즈’
초량1925에서 지금까지의 프로젝트가 원도심의 사라질 공간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리서치였다면, 현대 사회에서 주목하지 않고 사라져 가는 기술을 찾아내고 발굴하는 <비 메이커즈>를 새롭게 시작한다. 부산(Busan)의 만드는 사람들(Makers)을 지칭하는 이번 프로젝트는 ‘젊은 작가’와 ‘무형문화재 기능 명인’을 연결하여 장인으로부터 전통 기술을 배워보고 창작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매칭 프로젝트이다. 현대 예술과 전통 예술은 협업의 기회가 드물고 서로의 생각과 기술을 나눌 소통의 장이 흔치 않다. 그러나 장인이 보유하고 지켜 온 정신과 기술은 현대 작가들이 창작 활동에 중심축으로 삼아야 하는 태도와 정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분들이 계시는 동안 기록하고 소통을 추진해야 한다. <비 메이커즈>는 전통을 지켜온 세대와 현대 예술을 이끌어가는 세대가 만나 서로의 예술을 논하고 기술을 공유할 수 있도록 기술워크숍을 열었다. 권영관(불화장), 김창명(조선장), 배무삼(지연장), 송년순(침선장) 네 분의 장인이 강은경(식경험 디자인) 외 3명의 작가와 9월까지 워크숍을 진행한다. 워크숍을 마친 후에는 공개 토크와 참여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후속 프로그램을 예정하고 있다.

마중물이 되어
초량1925는 빠르게 변화하고 사라지는 부산의 문화들을 ‘공간’과 ‘기술’이란 주제로 연구하며 기록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사라질 장소와 골목, 어르신들과 우리의 전통은 이 지역 이 시대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미시사와 거시사가 교차하는 수많은 지점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것, 현시점에서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이다. ‘사라지는 장소’로부터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전통 기술’로부터 ‘현대 예술’을 발견해 내는 우리의 기록화 작업이 마중물이 되어 그 길에 더 많은 이들의 의지를 끌어들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글. 창파
사진. 김태정, 하영문, 홍석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