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그리는 지도 '불안의 좌표'
들어가며
냉혹한 계절이다. 겨울은 모든 생명이 움츠러드는 가혹한 시간이다. 추위와 빈곤으로 생명이 위협받는 겨울철이 되면 동물은 더욱 치열하게 먹이 사냥을 한다. 이 시대의 청년도 그렇다. 청년기는 낭만을 즐기는 시간에서 또 다른 시련을 견디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분주히 아르바이트하고 스펙을 쌓는다. 청년은 겨울처럼 척박하고 고단하며 불안하다.
전시장 전경 |
1.
프로젝트팀 ‘세모아’의 기획 전시 <불안의 좌표>는
청년의 불안을 말하고 있다. 2016년 12월부터 약 14개월간 꾸준히 청년 문제를 조사하고 스터디하여 전시로 구체화하였다. 12명의
팀원 모두가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년 스스로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미시사microhistory를
기록했다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전시는 청년부터 중년까지 다양한 경험치를 지닌 작가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불안을 말하고 있는가? 전시 초입에 아카이브 섹션에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 여기에는
주제 및 기획, 리서치 자료, 여러 청년의 이야기가 놓여
있다. 사진과 참고서적, 회의록 외에 ‘불안을 이야기하다’, ‘청년에게 불안을 묻다’ 등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20대부터 30대의 학생, 취준생, 아르바이트생, 직장인까지 인터뷰를 파일링하고 있었으나, 정보는 날 것 그대로였다. 기획자의 관점으로 편집되지 않은 아카이브는 명확한 포인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청춘, 꿈, 도전, N포세대, 청년실신, 자기계발서, 스펙 등 청년의 실상을 드러내는 언어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 중 ‘착한 청년’, ‘나쁜 청년’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청년을 향하는 수사는 대부분 사회적 요구이거나 외부에서 규정한 모습들이다. 여기에 부합하지 못할 때 그들은 자신을 나쁜 청년이라 부르고 있었다. 정작
나쁜 청년으로 성장시키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바뀌지 않은 채로 청년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음을 이들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불안은 누구의 책임인가? 당사자인가 제공자인가.
2.
전시는 이런 질문을 안내하듯 불안의 공간으로 관객을 이끈다. 관객은 불안이 내재된 세 가지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우선, 경쟁 공간이다. <청년상>(구헌주, 2018)은 불시에 우리를 면접장으로 이동시킨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는 청년, 그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채비를 한 듯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또 다른 공간은 1년에 단 하루 벌어지는 기이한 기도의
공간이다. <강남 프로젝트>(한소현, 2014~2017)는 인생의 첫 결전을 치르는 자녀의 총명을 기원하는 입시기도장이다. 그런가 하면 눈을 부릅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화면의 공간도 있다.
<망원경(望願鏡/望怨鏡)>(허병찬, 2018)은 종이컵 렌즈로 들여다보아야만 그 속에
장소가 보인다. 철거로 스러진 지붕과 벽돌들 뒤로 남겨진 건물이 대비되어 또 다른 도시는 전투장으로
변화한다.
두 번째로는 사유 공간이다. <끝나지 않은 길>(황지현, 2018)과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 Love>(황종현)는 길과 책을 관객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어딘가 존재하는 길, 누군가 손에 들려있는 책이다. 그 앞에 청년은 어떠한 심정일까?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공간을 함께
사유하며 따라가 본다. 이 길을 가는 자는 청년만은 아니다. 불안이
청년에 국한된 것이 아니듯 길도 책도 누군가는 이미 경험했으며 또 다른 이는 그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은
<embrace>(임수현), <불안>(김수민), 사이프로젝트(대구대학교)에서
나타나는 일상 공간이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 유명
커피 브랜드의 로고에 그려진 삶의 순간들, 실기실과 콩밭을 오가는 미술학도의 고뇌이다. 이 작품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의 단편을 연결하며 일상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것이 즐거움일지 힘겨움일지 불안일지 관객은 자신의 경험에 비춰 그들의 하루를 그려보게 된다.
3.
본인은 이글을 전시의 작품 리뷰가 아닌 세모아 팀과 기획
전반에 집중하며 개인의 감상을 덧대어 서술하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기획팀 학생들은 19명으로 시작해 현재 12명이 되면서 부담과 책임의식이 있었지만, 종지부를 향할수록 스스로 달라진 시각과 성취감을 느꼈다고 말해주었다. 전문
기획자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기획은 그 동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들이 주제의 구성부터
전시까지 기획의 전반을 경험하며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 또한, 학교 밖 생(生)의 현장에서
문화기획을 지도하는 교수의 교육 철학은 이들에게 탄탄한 토대가 되어 주었으리라. 전시를 설명하는 동안
기획팀의 열정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아카이브 속 청년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전시장에 가시화되었으면 어땠을까? 청년의 미시사와 사회 구조적 문제가 만나는 수많은 접점이 궁금하다. 그들의 질문은 이제 시작이니 다음 차례에 이 부분은 기대해본다. 그보다도
세모아 팀과 개인의 행보가 더욱 궁금하다. 팀의 정수는 협동과 나눔이라는 두 기술에 있다. 서로 무게를 지혜롭게 배분하고 그 지식을 타인과 슬기롭게 공유해야 한다. 예비
기획자들에게는 본인이 관심 있고 좋아하는 주제를 지금부터 찾아보길 권한다. 마침 그러한 것이 있다면
저돌적으로 다음 기획에 착수하길 부탁하는 바이다.
나가며
여전히 계절은 겨울이다.
그러나 겨울은 생명이 움트고 소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혹한의 계절에도 식물은 멈추지 않고 겨울눈을 만들어 기온, 바람, 습도 이 모든 게 적당한 어느 날 문득 싹을 틔운다. 그렇다면 불안이라는
좌표는 반대로 잎을 틔우는 생명의 좌표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곧 생명이 피어날 그 날을 고대하여 본다.
글. 창파
사진. 불안의
좌표 기획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