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만 기억'으로 나열한 단어들에 대하여
특수한 집단이나 지역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과정은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커뮤니티 아트라 일컫는 예술들이 그러한데 내부의 구성원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에서 커뮤니티의 인식 또는 가치의 변화를 이끌거나 사회적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커뮤니티 아트는 예술의 한 장르로 분류하고 있으나 필자는 권력과 계급, 사회와 커뮤니티, 집단과 개인, 향유와 소통과 같은 다양한 이슈를 유영하는 예술에 방식이라 말하겠다. 즉, 사회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서사를 파악해나가는 예술의 태도인 것이다.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감만 기억>의 서두를 커뮤니티 아트로 시작하는 이유는 본 공연이 미디어의 실험과 신체적 행위의 탐구라는 측면을 넘어서 드러내는 그 무언가를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공연을 보고 난 후 지속적으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단어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일종의 어떤 맥락을 갖고 있었는데, 단어를 나열하다 보니 커뮤니티 아트로 모아지고 있었다.
로컬리티 – 커뮤니티 - 리서치 - 협업 - 공동 서술 - 미시사 – 기록
이전의 공공미술이 조형적 작품을 만드는 시각화에 치중했다면, 커뮤니티 아트는 지역의 정체성과 커뮤니티의 현재를 파악하고 주민과 소통하는 과정 중점적 예술이라는 차이를 갖는다. 또한 예술을 매개로 내부 구성원들이 참여하며 다양한 과정에서 가치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이 예술은 엘리트주의처럼 소수를 위한 고급 예술이 아니며, 오히려 다수의 대중이 향유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예술인 것이다. 또 예술의 독창성, 진정성, 유일무이성, 저자성으로 대표되는 유미주의 미술과는 상대적으로, 확장된 공공의 장에서 펼쳐지는 예술이다. 예술가와 관객이 창작에 주체적으로 협업하는 공동 서술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매우 수평적이다. 이미 예술은 제도권 바깥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현장은 예술가에게 사회 참여적 태도나 매개자, 기획자, 동반자와 같은 창작 외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다시 <감만 기억>이다. 어떤 부분이 커뮤니티 아트와 맞닿아 있는가.
낮고 좁고 구부러진
한동안 넋을 잃고 광경을 바라봤다. 11월 4일과 18일, 두 공연의 처음, 첫 장면이다. 감만창의문화촌 5층으로 올라간 관객들은 지붕 끝자락에 몸을 붙여 일렬로 나란히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서 공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 순간 눈에 들어온 모습 때문인가. 언덕으로부터 경사진 골목을 따라 옥상의 행렬이 줄을 세우고 있었고, 평평하지 않은 땅, 집, 길 모두 높낮이가 오밀조밀하였다. 직각을 벗어난 모서리는 제각기 개성이 넘쳤고 참으로 부산스러운 모습이었다. 부산의 동구, 중구, 남구까지 항구를 마주한 경사진 동네는 비슷한 지형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네마다 그 생김새와 정서가 모두 다르다. 바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장소를 알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매번 지나는 길은 그저 삶을 살아내는 통로일 뿐이다. 그러나 <감만 기억>은 관객에게 감만동 전체를 먼저 조망하도록 시야를 열어주었다. ‘우리는 이제 낮고 좁고 구부러진 저 장소들로 향할 거야'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호명하고 떠올리고
첫 번째는 바로 로컬리티이다. 로컬리티는 지역의 정체성이라 하겠다. 용어 적으로는 로컬(local)의 추상 명사형이다. 로컬은 지역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이고, 로컬리티는 그 지역과 장소를 묶는 공통의 의식과 사회적 메커니즘을 포괄한다. <감만 기억>은 4일에 투어 형식의 공연을 ‘사전 공연’으로 칭하였고, 비디오 콜라주(비디오 파사드)와 댄스가 결합한 18일 공연을 ‘본 공연’으로 구분하였다. 필자는 로컬리티와 커뮤니티가 이 두 공연을 관통하고 연결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라 주장한다. 우선 사전 공연에서 관객은 안내자를 따라 감만동 지역을 이동하며 공간을 시각으로 촉각으로 후각으로 경험한다. 공감각적인 경험은 강렬한 기억으로 새겨지기 마련이다. 일반적 공연처럼 닫힌 공간에서의 무대가 아닌, 현장에서의 공연이기에 골목과 다채로운 집들의 표정마저 배경으로 무대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현장성은 관객에게 신체의 모든 감각을 열도록 제안하고 동시에 공간의 모든 즉흥적 요소를 극 안으로 포함하는 장소 특정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사전 공연과 본 공연에서 각기 다르지만 이러한 즉흥성이 존재했다. 또한 동네가 지닌 시간의 흔적들은 무용수의 몸과 부딪치며 공간을 그려가고 과거를 자꾸만 호명하였다. 실제로 무용수가 다음 무용수를 부르는 행위는 극의 중간마다 반복되었는데, 이것은 장면을 전환하는 역할로부터 탈주해 감만동의 로컬리티를, 커뮤니티를, 정체성을, 지난 시간을, 그곳에 삶과 사람들을 일일이 부르며 과거의 기억을 현재적 시간으로 소환시키고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춤의 궤적들이 장소적 특수성과 더해져 현재의 감만을 더욱 강하게 잡아 붙든다. 마치 사라질 시간의 유한함을 기억이라는 영원한 방으로 옮겨 두듯이 말이다.
너무도 유쾌한
옥상, 어느 집 대문 위, 계단과 골목길, 나대지 같은 장소를 무대로 하다 보니 지나가는 주민과 무용수가 겹쳐지는 즉흥적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행인은 갑자기 주인공처럼 주목을 받기도 하고 극의 미장센이 되기도 하며 가늠할 수 없었던 즉흥성으로 공연에 흡수되었다. 일반적으로 무대를 중심으로 한 극은 배우와 관객을 철저히 분리한다. 그러나 <감만 기억>의 경우, 공연 장소로 이동할 때 출연자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고 참여한 주민은 공연에 자신의 이야기를 수다로 덧댄다. 교감은 서로 감정을 나누는 상태를 말한다. 앞서 다양한 집단이나 개인과 소통을 촉발하는 협업이 커뮤니티 아트의 태도라고 하였는데, 이때 교감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비예술 범주의 사람들과 합의를 이뤄내며 공동의 언어나 몸짓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교감만큼 작품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없을 것이다. 예술가는 지역과 커뮤니티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로 이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경제적 관계, 권력적 메커니즘, 문화적 맥락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게 된다. 커뮤니티 아트에서의 지역에 다가가는 핵심적 쟁점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역 커뮤니티의 깊은 속사정은 바깥의 외부자는 알지도 파악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커뮤니티의 장벽을 유연하게 넘어가는 기술에는 교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지점에서 <감만 기억>이 감만동 커뮤니티와 이룬 협업 과정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들은 감만동을 장소적으로 리서치하고 개인의 미시사를 집요하게 아카이브 하였다. 이 전술은 커뮤니티가 갖는 주요 쟁점을 우회적으로 또는 유연한 태도로 다룬다. 직접적인 투사의 모습보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고도의 전략이다. 동시에 예술가에게는 매우 어려운 방식이기도 하다. 허경미 안무가와 홍석진 작가는 각기 안무와 영상에 다수의 연출 경험이 있으며 이들이 나눈 협업이 누적된 만큼 균형 있게 역할을 분배하였다. 이를테면 홍석진 작가는 사전 공연에 배경이 되는 지역을 여름부터 돌아보며 지속적으로 공간 리서치를 수행했다. 허경미 안무가는 주민들에게 자신의 안무를 강요하지 않고 하루 일과를 춤으로 표현하는 법, 제일 하기 싫은 일, 제일 하고 싶은 일 등 일상의 언어로 워크숍에 참여를 유도하였다. 그 동작은 공연 전반에 거쳐 비디오 콜라주나 댄스에서 결정적 상징으로 등장한다. 비디오 콜라주에 삽입된 주민의 춤사위는 워크숍 프로그램에서 주로 촬영되었는데, 촬영 후 바로 가편집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과정을 공유하고 어떤 작업인지 이해시켜 커뮤니티의 신뢰를 획득하였다고 한다. 또 무대에서 빨래를 탁-탁- 털어내던 커뮤니티 댄서의 거침없는 장면이나, 무용수와 흥겹게 어우러지는 단체 댄스 장면에서 관객 모두 미소를 짓게 하였다. 이처럼 공연에 커뮤니티가 스며들기까지 그 과정에 얼마나 다양한 장치들이 있었을지 가늠되지 않지만, 그 전술은 제대로 작동하였다. 결론적으로 <감만 기억>은 커뮤니티의 동의를 얻었으며, 그 신뢰가 공연의 토대가 되어 준 것이다.
사소한 그러나 전부인
마지막 단어들은 개인사 또는 미시사의 기록이다. 주민에게 수집한 구술채록 리서치는 공연에 주요한 키워드로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비디오 콜라주나 댄스에서 주민에게 받은 도면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된다. 주민이 자신의 집을 설명하며 그려나갔을 도면은 그 이야기의 시공간을 새긴 채 반복적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주민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면서 자신들이 일궈 온 터전에 대한 기억이 다가올 변화 앞에서 무용한 것임을, 그래도 의미 있는 시간임을 읊조린다. 개인이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사적인 인생사지만, 그 질곡 안에 부산이라는 지역사와 한국의 근현대사가 맞물려 수많은 접점을 만들고 있다. 이는 다시 관객에게로 감정적 공감을 형성하며 공연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집단적 기억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처럼 <감만 기억>은 예술 언어로 주변(개인)으로부터 중심(전체)를 이야기하였으며, 도시의 위계 구조 안에서 감추어진 비공식적 요소를 발굴하였고, 내밀한 개인의 기록과 생활사를 끌어올려 문화적 맥락으로 가시화시킨다.
모든 도시는 고유한 시간을 품는다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렇게 말 한 바 있다. “과거는 마치 현재가 평생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벽처럼 작용한다. 아니면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즉시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변형되어 버린다. 그가 눈으로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금 그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을 생각나게 하며, 현재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생각난 것이 핵심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해 연속적으로 흐른다. 지금의 도시 역시 무수히 스러져 간 지나간 도시를 딛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 사이에 지금도 지나는 현재는 무한하지만 찰나의 기억이고, 기억은 항상 현재가 아닌 과거에 기인하므로, 지나온 망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기억을 자꾸만 현재로 끌어 올려야 한다. 그것이 존 버거가 말하는 경험이며, 현재를 공유하는 이들과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가는 행위가 갖는 중요한 핵심임을 전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감만 기억>은 감만동의 고유한 시간을 현재적 이야기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도래하는 미래에 앞서 끊임없이 회자하여야 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어 주었다.
불현듯 실마리가 풀리는 순간이 있는데, 글 말미에 덧대어 본다. <감만 기억>의 사전 공연과 본 공연은 3주 정도의 시간차가 있었다. 사전 공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두 공연은 모두 탄탄한 구성이었고 매끄러웠다. 글을 쓰면서 두 공연을 수없이 복기하다 문득 깨달았다. 비디오 콜라주에 등장하는 저 장면 안에 내가 있구나. 렌즈가 향하던 곳을 나도 내리 보았고, 춤이 이어지던 그 길을 나도 같이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였나. 감만동을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느껴지는 것이. 또 저 유한한 시간에 이토록 아쉬운 것이. 지역 리서치와 미시사에 관심을 둔 이로써 느끼는 긴 여운과 울림에 감사할 따름이다.
감만기억 part 1 https://www.youtube.com/watch?v=-2XDNl4Ogfc
감만기억 part 2 https://www.youtube.com/watch?v=bMvK_22rc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