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계로 사유하는 ‘축대’ 그리고 ‘양치식물’에 대하여

중간계로 사유하는 ‘축대’  그리고 ‘양치식물’에 대하여


글. 실험실 씨(박미라, 창파)


그렇다, 섬의 얼굴, 소리, 냄새를 이루는 풀과 동물, 산의 지층, 먼지 낀 황토색에서 보랏빛이 도는 갈색에 이르는 갖가지 종류의 흙, 넓은 주석 층, 이 모든 것들을 그냥 보아 넘길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이름들을 알아야 한다. 사방의 땅에는 그곳에서만 적용되는 독특한 법칙에 따라 동식물이 공생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모든 장소의 이름은 식물의 세계(Flora)와 동물의 세계(Fauna)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우하게 되는 암호가 아닐까?

_ 발터 벤야민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 


우리는 종종 자연의 존재를 잊곤 한다. 정확히는 도시 공간에서 생존하는 작은 식물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알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자연은 우리의 도시를 공유하고 있으며 도시에 공존한다. 이번 식생리서치는 봉산마을이라는 도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식물 개체와 종을 파악하는 조사로서 학문적 깊이보다는 기본적인 생태 지식 정보를 토대로 식생[1]의 동정[2]을 살피었다. 우선적으로 마을에 자생하는 식물을 관찰하고 그들의 점유 공간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찰자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o 공간 요소
대상 지역은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위치한 봉산마을이다. 조사 기간은 2019년 1월 28일부터 2월 26일까지 비정기적으로 실시하였다. 봉산마을은 봉래언덕길부터 사택길, 외나무길, 나팔꽃길, 산유화길, 동백꽃길, 찬새미길을 포함한다. 지리적으로는 부산항대교를 사이에 두고 북항 재개발 지역, 동구 초량동, 중구 영주동, 남구 감만동 등을 마주하고 있다. 마을의 아래 지역인 평지에는 1937년도에 건립한 한진중공업(주) 영도조선소가 위치하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조선소로 이 마을의 발전에 미친 상호적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도판 1, 2).

마을의 지형은 대부분이 경사면으로 이뤄져 있다. 가로로는 골목이, 세로로는 계단길이 주로 보인다. 골목은 두 사람이 오가는 넓이부터 좁아지거나 다시 넓어지는 가변크기이다. 계단 길은 보행자가 오르내리기에 편리한 구조보다는 이미 형성된 자연적 지형이나 건축물 간의 관계, 토지 형태에 따라 개성 있는 모양을 보인다. 봉산마을 골목에서는 축대가 자주 관찰된다(도판 5, 6). 축대는 비탈진 토지를 평평하게 돋우기 위한 건축의 방법이면서 땅에서 스며드는 물과 습기로부터 생활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정확한 사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축대를 이루는 돌의 크기와 색감을 보았을 때, 쌓여진 시기가 다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관찰자는 축대라는 공간을 이번 리서치에서 중요한 상징적 공간이자, 식생과 도시 공간의 관계를 풀어내는 핵심적인 요소로 해석하려 한다.

식물은 공간에 순응하기도 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기도 한다. 도시를 구성하는 공간적 요소들은 생태계와 보이지 않지만 격렬한 겨루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봉산마을의 축대에 주목하는 것은 공간과 생태의 치열한 대립각이 드러내는 장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리서치 초기의 관심은 사람과 식생 간에 공존과 공간 공유에 있었다. 봉산마을의 리서치 회차가 거듭될수록 공간 요소와 식물군의 치열한 공방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공간 요소는 식생의 환경 조건을 구성하는 배경이 되어주기도 하고, 존폐를 가르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봉산마을에서 볼 수 있는 비정형 토지, 유선형 골목, 불규칙한 계단, 높낮이가 상이한 축대는 이곳을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 요소들이다. 이러한 공간에 작은 균열이라도 보이면 그곳에는 언제나 식생이 자라고 있었다.

봉산마을의 축대는 공간과 생태를 연결하는 핵심적 장소이자 중간계이다. 이곳은 ‘제약'과 ‘극복’이라는 두 단어를 상징한다. 골목을 걷다 보면 새로이 단장된 길이 깔끔해서 오히려 낯설어질 때가 있다. 골목 다수가 우레탄 또는 콘크리트로 덮여 있고, 보도블럭이 놓인 길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이곳은 녹지가 매우 빈약하다. 그러다보니 흙이 노출된 장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녹지로 보이는 장소들은 주민이 가꾸는 화분, 대문 앞의 화단, 공가, 나대지, 블루베리 농장 터 뿐이었다. 특이한 점은 몇 년 전부터 마을 사업으로 운영되는 블루베리 농장도 바닥은 콘크리트였고 그 위에 화분을 놓고 경작하고 있었다. 식물이 자생하기 위한 토대가 없는 마을, 통행만을 목적으로 한 골목은 사람 이외의 생명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도시의 습성을 고스란히 반증하고 있었다.


o 양치식물의 재발견
그동안의 숲이나 생태계에 대한 배움에 있어 중심에 두는 것은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와 꽃이었다. 우리가 식물이나 자연을 생각할 때 나무와 꽃을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생활사에서 나무는 인간의 생존과 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꽃의 아름다움 역시 벌과 나비와 같은 곤충의 외에도 인간에게 많은 애정을 받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고사리와 같은 양치류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식물군이다. 그럼에도 관찰자가 양치식물에 집중한 것은 두 가지의 이유에서이다. 우선,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축대는 봉산마을의 공간 요소에서 중요한 장소이며, 양치식물의 식생 근거지가 되어준다. 또한 이곳의 초본과 목본에서는 부산 경남권을 대표하는 지표종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그 열악함이 오히려 다른 식생 조사에서는 소외되는 식물인 양치식물군에게 시선을 머물도록 하였다. 인류 역사상 ‘제약’이 있었을 때, 그 뒤를 따르는 항목은 대부분 ‘극복’이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이다. 평지가 드문 경사지에서 삶의 공간을 개척하기 위해 ‘축대’라는 건축 기술이 강구되었고, 봉산마을의 골목은 노후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흙보다는 ‘우레탄’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다시 제약의 땅이 된 이곳에서 자리잡은 식생이 바로 ‘양치식물’이기 때문이다.

봉산마을의 양치식물은 축대의 돌 틈새와 콘크리트 균열 지점에서 자생한다. 도깨비쇠고비, 사철고사리, 꼬리고사리, 봉의꼬리와 같이 4종의 양치식물이 마을 공간 전반에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양치식물은 잎, 뿌리, 줄기를 갖고 있는 유관속식물로 가장 오래된 원시적인 식물이다.[3] ≪양치식물의 자연사≫에 따르면 후안페르난데스 제도에는 54종의 고사리들이 자생하고 있고, 제일 높은 봉우리부터 해안까지 섬 전역에 퍼져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협곡에 무성한 무리를 볼 수 있는데, 양치식물이 잘 자라는 이유는 고온다습한 바다의 공기가 협곡을 따라 상승하면서 식는 과정에 발생하는 결로가 모이는 곳에 주로 운무림[4]이 형성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고사리류는 탁 트인 바위산의 경사진 곳에서 왕성하게 서식한다고 말한다.[5] 봉산마을의 축대나 돌 틈에서 양치식물이 자생하는 것도 그들의 오래된 습성에서 온 것이며 적합한 환경을 찾아가는 본능적인 생존 방식이라 하겠다. 또한 영도의 다습한 기후는 영도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영도의 중심에 위치한 봉래산 정상은 종종 구름에 가려져 있으며, 이러한 섬의 특수성과 경사면에 위치한 봉산마을의 지리적 환경이 양치식물 생장에 최적의 조건이 되어 주었다. 바다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머금은 돌은 양치식물에 생의 한켠을 내어주는 것이다.

양치식물은 꽃을 피우지 않지만, 녹색 아우라를 품고 있다. 사택길 축대에 자라난 이들은 누군가 잘 가꾸어 놓은 수직 정원처럼 골목을 초록으로 생생하게 물들인다. 화려한 고사리의 아우라는 1830년대 영국에서 한차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빅토리아시대의 고사리 열풍은 공예와 가구의 외피에 장식으로 쓰일 정도로 대중적 문화를 점령했다. 고사리 열풍의 배경에는 1820년대 만들어진 ‘워드상자(Wardian case)’라는 유리 식물 상자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밀폐된 유리 상자는 식물과 흙이 보유한 수분을 담고 있어 장시간 물을 주지 않아도 식물을 자생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가드닝을 위한 용도라기 보다는 빅토리아시대에 교역과 제국화에 중심에서 활용되었다. 워드상자로 이동된 식물들은 국가의 영토를 넘나들며 재래종을 와해하였으며, 식민지의 원자재를 제국으로 이동시키는 또 다른 중간계로 작동하였다. 영도 역시 오래 전부터 섬이라는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다양한 문물을 맞이하는 관문이었고, 정착을 시도하는 중간계였던 것이다.


o 글을 마치며
숲을 벗어난 이번 리서치에서 관찰자가 만난 식생들은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에도 수 차례 마주할 수 있는 식물체였다. 집 앞, 버스정류장, 화단, 인도, 담벼락 등지에서 몰래 그 생명을 싹 틔우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삶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식용이나 다양한 쓰임새를 지녀 이름을 불리던 품종이었고, 달라진 도시에서는 필요성을 잃고 뽑히고 잘려나가도 무던히도 다시 생명력을 발휘하여 잡초로 각인되었다. 쓰임새를 상실한 잡초를 우리는 다시 바라봐야 한다. 생명체는 쓰임새의 여부를 떠나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사방의 땅에는 그곳에서만 적용되는 독특한 법칙’이 있으며, 이러한 보이지 않는 법칙은 봉산마을의 축대와 같이 중간계를 만들고 있다. 봉산마을은 현재 미래적 쓰임새를 고민하고 있다. 현재의 시선으로 미래적 쓰임새를 파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봉산마을의 식생 리서치도 더 나은 쓰임새를 찾는 하나의 시도이자 과정이라 하겠다. 이곳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의 마음이 워드상자의 이중적 쓰임새처럼 변질하지 않고 봉산마을에 다양한 중간계를 심어나가길 바라본다.




[1]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모여 사는 특유한 식물의 집단. 그 지역의 대표 식물에 의하여 분류하는데 조성(組成)과 크기는 엄밀히 정하여져 있지 않고 동일종(同一種)일 때는 순식생, 이종(異種)이 혼합한 것은 이종 식생이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

[2] 생물의 분류학상의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3] 이창숙, 이강협 저, <한국의 양치식물>, 지오북, 2015. 14p 인용

[4] 끊임없이 구름이나 안개가 끼는 장소에 발달하며 높은 습도 때문에 선태류나 착생 유관속식물이 두텁게 착생한 삼림. <생명과학대사전> 네이버 참조

[5] 로빈 C. 모란 저, 김태영 역, <양치식물의 자연사>, 지오북, 2004. 204-205p 인용

[6] <양치식물의 자연사>에 등장하는 소제목을 차용함. 이 책에 따르면 고사리 열풍은 1830년에서 30년 동안 영국 빅토리아시대에 유행하던 고사리를 키우는 취향이다. 당시 영국의 암울했던 시대상과 맞물려 꽃을 피우지 않는 고사리는 어둠을 상징하고, 이를 담아 키우는 워드상자(Wardian case) 또한 다양한 디자인으로 제작되어 소비되었다. 최근 테라리움(terrarium)으로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어 취미 활동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