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관찰하는 산책길 《소요의 시간》 여름산책편, 수정산, 2020.09.04-09.06

걷고 관찰하는 산책길 《소요의 시간》 여름산책편, 수정산, 2020.09.04-09.06


글. 창파


시장, 골목, 여관, 적산가옥, 장인 공방, 달리는 트럭 그리고 숲 산책로. 이곳은 일상적인 공간이자, 그간 기획한 프로젝트가 실현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개성 넘치는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누군가 물어올 때가 있다. 그럼 동시에 여러 단어가 빠르게 펼쳐진다. 전시, 연구조사, 구술채록, 창작활동, 식물 리서치, 강연, 공연, 퍼포먼스… 특히 상대가 예술과 무관한 사람이라면 이 중 어느 답을 내놓아도 그의 얼굴에 ‘그게 뭔데(나와 상관없네)’라는 표정이 금새 스친다. 무어라 불리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 실은 핵심이다.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여러 분야를 향해 열려 있다는 의미이고, 사회의 다양한 지점에 맞닿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소요의 시간>은 분명 다양한 결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숲속에서의 힐링 또는 산책, 생태체험, 지역 공부, 야외 공연, 전시처럼 저마다 시선으로 이해하고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면 ‘지역, 자연, 예술이 교차하는 융복합 산책’ 좀 더 친근하게는 ‘동네 뒷산에서 숲해설과 지역이야기를 들으며 예술에 참여하기’ 정도이지 않을까.


수정산, 초량천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
왜 수정산일까? 수정산은 수정동 산복도로에 인접한 생태 구역으로, 수정(水晶)이라는 이름처럼 물이 맑고 마르지 않는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초량천, 서쪽에는 부산천이 자리하며 계곡을 따라 곰솔, 편백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 다양한 식물군락이 우거진 숲이기도 하다. 물길은 수정동으로 이어져 다양한 물길을 만들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물길은 복개되어 현재의 골목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길 밑에는 여전히 수정산으로부터 물이 흐른다. 어느 날 물의 발원지를 찾아 산을 올랐고, 나무 사이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흔적을 발견했다. 타일, 시멘트 벽돌, 화장실, 아궁이… 누군가 살았던 집터가 분명했다. 초량동과 수정동은 한국전쟁 시기에 부산으로 이주해 온 이들로 인구가 급증하며 경사지에 판자촌이 대거 등장했다. 그러나 이 비탈에서도 밀려난 이들은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야 했고, 산에서 찾은 집터도 그때의 흔적이었을 게다. 한국전쟁 후 사람들은 가난으로부터 삶을 지켜내기 바빴고, 산은 생계를 위한 자원의 공급처였다. 나무를 베어 내다 팔고, 군불을 피우고, 밥을 지었다. 판자촌이 늘어갈수록 수정산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1967년 산림청이 발족하고 1970년대 전국적으로 산림녹사화업이 시작되면서 ‘나무를 심자’는 캠페인이 일아 4월 5일 식목일이면 아이도 어른도 붉은 산에 올라 묘목을 심었다. 지금의 푸른 산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식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수집하고 예술 더하기
걷고 관찰하는 산책길 <소요의 시간>은 다양한 이야기를 보유한 수정산 산책로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예술을 체험하며 지역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융복합 예술 프로젝트이다. 소요(逍遙)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걷는 산책을 말한다. 그 정서에는 즐거움과 느린 걸음이 담겨 있다. 기본적으로 천천히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관찰하는 시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 숲에서 부산의 근현대 생활사와 식물문화를 연결하며 교차점을 찾아 보았다. 본격적인 리서치에 앞서 식물을 관찰하며 주요 범위를 구체화하였다. 전체 프로젝트의 과정은 사전 리서치, 산책 프로그램, 아카이브 전시로 구성되며, 리서치는 2020년 5월부터 7월까지 진행되었다. 전문가와 현장을 답사하거나 강연을 들으며 전문정보를 통해 수정산의 지역과 생태를 이해하였다. 또한 수정아파트, 수정공원로, 고관입구 등 수정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토박이 주민, 수정동 출신의 지역민을 인터뷰하며 1950년 이후의 수정동의 장소성을 통해 지역 연구에 기틀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산과 마을의 상호관계, 남성과 여성의 노동, 주거 공간 등의 생활사를 수집하였다. 이 모든 과정은 체험형 산책 프로그램과 아카이브 전시로 갈무리되어 관객에서 선보인다.


지역, 자연, 예술이 교차하는 경험, 여름 산책
리서치가 기획구성원, 예술인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소요의 시간> 여름 산책은 일반관객이 참여하는 체험형 프로그램이다. 지난 9월 4일(금)부터 9월 6일(일)까지 여름 시즌에 맞춘 산책 프로그램이 개최되었다. 하루에 1회 산책에는 사전에 예약한 스무 명의 신청자만이 참여할 수 있다. 여름 산책은 수정산의 산책로 입구에서 시작해 초량천을 거슬러 완만한 길을 약 3시간 동안 걸어가며 진행되었다. 전체 코스에는 29개의 이야기 스팟이 있어 자연과 지역에 관한 해설을 듣고 참여작가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예술 이야기’에는 시각예술작가 7명과 공연자 3명이 참여해 연구자이자 창작자로 수정산을 해석하고 숲속에 작품을 설치하거나 경험하도록 작품을 제작하였다. 초량천 옆 정자의 의자 위에 놓인 식물도감 <수정산 그리고…>는 김진주 작가의 작품으로 수정산에 자생하는 식물과 작은 곤충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이재은 안무가의 <식물이 되어보자>는 눈으로 감상하는 춤이 아닌 자유롭게 상상하는 춤이다. 관객은 선베드에 누워 작가의 음성을 듣고 의식을 따라가거나 손을 움직이거나 하며 오감을 열어 감각하는 춤을 시도하였다. 정만영 작가는 오동나무로 지팡이이자 작품인 <사운드 브리어 스틱 Sound Brear Stick>을 제작하였다. 관객은 ‘T’자 모양의 스틱을 들고 다니며 산행에 도움을 받기도 하고, 특정 장소에서 산책로의 질감을 체험한다. 풍선과 가는 색실로 공간을 재현한 김태희 작가의 <그때와 지금, 안과 밖>은 한때 사람이 살던 집터에 설치되었다. 숲속에 인공 소재로 지어진 집이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졌다. 그 공간에는 또 다른 생명체가 자라나며 공간의 순환과 보이지 않는 흔적이 축적된다. 작가는 그 공간을 소환하듯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공간을 구현하였다. 강은경 작가의 <새는 바가지>는 약수터 바가지에서 착안하여 산책하는 동안 사람들이 물을 마실 때 사용하는 도구로 진짜 물이 새는 바가지를 만들었다. 이 바가지로 관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물을 마셔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바가지에서 흐르는 물을 서로 이어보는 물길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자연의 물을 통제하고 끌어쓰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처럼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물길을 통해 모색하고 있다. 김덕희 작가의 <Calling Nature>는 숲과 이질적인 투명한 바위를 만들고 그 속에는 핸드폰이 하나를 넣어 두었다. 관객은 번호가 적힌 인조 나뭇잎을 가져가 언제 어디서든 바위에게 연락을 할 수 있다. 바위에게 전화를 걸어 볼 수 있지만 대화는 나눌 수 없고, 문자는 보낼 수 있지만 회신을 받을 수 없다. 소통과 불통의 사이에서 작가는 인간이 환경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전지 작가의 <‘아’-소리나는 그 일들>은 수정동과 수정산에 관한 여러 사람의 기억을 수집하고 재구성한 단편 만화이다. 총 46컷의 만화는 천에 인쇄되어 스무 그루의 나무에 설치되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수정동에 정착한 피란민부터 국가적인 사건과 개인의 이야기를 오가며 수정산 일대의 생활상을 보여주었다.

자, 이제 <소요의 시간>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무어라 불리는 건 크게 중요치 않다. 그것이 예술의 외연을 확장하고 지역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어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소요의 시간>은 단풍이 물든 수정산에서의 ‘가을 산책(10월 31일 ~ 11월 1일)’과 초량동 일식가옥(등록문화재349호)에서 열리는 ‘아카이브 전시(10월 31일 ~ 11월 7일)’를 예정하고 있다.
* 본 원고는 '공감 그리고' 38호 가을호, 공감의 뱃고동의 [Harmony(문화다양성)] 코너에 기고하는 글이다.


여름산책 리뷰